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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디 쓰는 사람들

30년 제조 강자의 AI 전환(AX) 기록 ① — 도구만으로는 회사가 바뀌지 않았다

매출 2,885억, 임직원 1,000명 규모의 색조 화장품 ODM 기업이 자기 회사를 한눈에 보지 못했던 이유. 제조업 AX는 AI 도구를 나눠주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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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Hany, 15년차 회계사
Jun 07, 2026
30년 제조 강자의 AI 전환(AX) 기록 ① — 도구만으로는 회사가 바뀌지 않았다
Contents
AI Labs 운영일지 #1 — 우리가 전담 조직을 만든 이유정밀한 회사가, 정작 자기 자신은 보지 못했습니다먼저 한 일은, 소통의 토대를 깔고 손에 도구를 쥐여주는 것이었습니다개인이 도구를 쓰는 것과, 회사가 바뀌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AI Labs의 첫 과제는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였습니다1편을 마치며

AI Labs 운영일지 #1 — 우리가 전담 조직을 만든 이유

매출 2,885억 원, 임직원 1,000명 규모의 색조 화장품 ODM 기업 C&C인터내셔널이 'AI로 작동하는 회사'로 바뀌는 과정 — 제조업 AX(AI 전환)의 실제 사례를, 그 회사의 AI Labs를 이끌며 곁에서 함께 만든 사람의 시점으로 기록합니다. 첫 편은 '왜 시작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밀한 회사가, 정작 자기 자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C&C인터내셔널은 만드는 일에 관해서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곳입니다.

1997년에 시작해 30년 가까이 색조 화장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립스틱·립틴트·아이라이너·마스카라 같은 포인트 메이크업이 주력이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로레알·에스티로더·코티·LVMH 글로벌 4대 브랜드의 품질 검사를 모두 통과한 ODM입니다. 고객사만 100여 곳, 어떤 대표 제품은 한 해에만 600만 개 넘게 팔렸습니다.

0.1g 단위로 색을 맞추고, 물과 땀에 지워지지 않는 방수 기술을 도면 수준으로 관리하는 회사입니다. 제조의 정밀함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밀한 회사가, 정작 회사 자신은 한눈에 보지 못했습니다.

규모로 보면 2025년 매출이 약 2,885억 원으로 연간 최대를 경신했고, 그해 처음으로 해외 매출이 국내를 넘어섰습니다. 생산 인력까지 포함하면 임직원은 1,000명 규모입니다. 회사가 크다보니 한눈에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오늘 생산이 얼마나 됐는지조차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습니다. 설령 총량을 안다 해도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는 순간 막혔습니다. 어느 공장, 어느 공정의 생산이 많았는지, 투입한 인원 대비 생산량이 어디서 어떻게 변동했는지를 보려면 자료를 일일이 모으고 맞춰야 해서 며칠이 걸렸습니다. 채용은 계속 하는데 현장은 늘 사람이 부족하다고 했고, 그 이유를 정확히 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원 대비 생산성이 공정 단위로 보이지 않으니, 사람을 더 뽑아야 하는지조차 감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객 이슈는 담당자별로 흩어져 보고됐고, 그 안에 어떤 패턴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출을 더 늘리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으로는 알아도 데이터로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제품 하나하나는 그토록 정밀하게 통제하면서, 회사 전체의 흐름은 누구도 실시간으로 조망하지 못하는 상태. 저는 이 간극이 이 회사의 진짜 문제라고 봤습니다.


먼저 한 일은, 소통의 토대를 깔고 손에 도구를 쥐여주는 것이었습니다

CFO의 진단은 명확했습니다. 데이터가 흐르는 회사로 다시 세팅해야 한다는 것.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첫걸음은 거창한 AI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의 토대였습니다. Slack과 Google Workspace를 도입했습니다. 문서는 클라우드에 두고 그 위에서 Slack으로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구조. 흩어져 있던 정보와 대화가 한곳에서 흐를 수 있는 바닥을 먼저 깔았습니다.

그다음, AI를 직접 손에 쥐여줬습니다. 리더십에는 Claude를, 의사결정과 사고를 돕는 도구로. 엑셀을 매일 쓰는 실무자에게는 Gridie를, 그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반응은 좋았습니다. "AI가 실제 업무에 쓸모가 있겠다"는 공감대가 분명히 올라갔습니다. 누군가는 보고서 초안을 빠르게 만들었고, 누군가는 반복하던 엑셀 작업을 줄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면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개인이 도구를 쓰는 것과, 회사가 바뀌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도구는 잘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기에 머물렀습니다.

잘 쓰는 사람은 잘 썼고, 안 쓰는 사람은 그대로였습니다. 누군가의 책상에서 일어난 효율화는 그 책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회사가 일하는 방식 자체, 그러니까 체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결과라고 봤습니다.

AI 도구를 나눠주는 것은 '능력'을 준 것이지 '구조'를 바꾼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역량은 흩어지기 쉽고, 흩어진 역량은 회사의 자산으로 쌓이지 않습니다. 체계적인 체질 개선은 누군가가 전담으로, 회사 전체를 대상으로 설계하고 밀어붙여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담 조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CFO와 제가 뜻을 모아 발족한 AI Labs입니다.


AI Labs의 첫 과제는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였습니다

AI Labs가 가장 먼저 손댄 것은 화려한 자동화가 아니었습니다. 데이터의 정합성이었습니다.

이 일을 이끌 사람으로 박노권 FP&A 팀장이 합류했습니다. 마이리얼트립에서 데이터마트를 구축하고, FP&A 관점으로 부문별 수익성 개선에 핵심 역할을 했던 분입니다. 합류해서 가장 먼저 한 일도 똑같았습니다. 데이터마트 구축이었습니다.

순서는 영업 → 생산 → 구매 → 연구였습니다. 부문별로 SAP와 MES의 핵심 데이터 구조를 하나씩 파악하고 설계했습니다.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꺼내 보더라도 같은 값이 나오는 정합성 높은 데이터의 단일 원천을 만드는 것.

왜 이것이 먼저여야 했을까요. AI든 대시보드든 결국 데이터 위에서 돕니다. 바닥의 데이터가 부서마다 다르고 시점마다 어긋나면, 그 위에 아무리 똑똑한 자동화를 올려도 '그럴듯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결과'만 나옵니다. 정합성 없는 데이터 위의 AI는 오히려 위험합니다. 저는 여기서 속도를 내고 싶은 유혹을 눌렀습니다. 토대가 흔들리면 그 위의 모든 것이 흔들리니까요.

마트가 자리를 잡자, 곧바로 첫 성과가 나왔습니다.

별도의 보고 없이, 매일 자동으로 업데이트되는 수주·영업·생산 현황 대시보드.

누군가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해 보고서를 올리던 그 모든 과정이 사라졌습니다. 회사가 매일 아침 스스로를 한눈에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총량만이 아닙니다. 어느 공장, 어느 공정에서 생산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투입 인원 대비 생산량이 어디서 변했는지까지 분해해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처음에 막혔던 질문 — "어느 공정의 생산성이 왜 떨어졌지?" — 에, 이제는 며칠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답할 수 있습니다.

이 대시보드를 만든 방식에도 원칙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시스템을 짓지 않았습니다.

먼저 스프레드시트로 싸게 검증했습니다. 정말 이 지표가 매일 필요한지, 어떤 모양으로 봐야 의사결정에 쓰이는지는 만들어 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처음에 "이것도 봐야 한다, 저것도 중요하다"며 올라온 지표는 수십 개였습니다. 그걸 다 갖춘 시스템을 처음부터 개발했다면 몇 달이 걸렸을 것이고, 완성한 뒤에야 절반은 아무도 안 본다는 걸 알게 됐을 겁니다. 그래서 무거운 개발 대신, 며칠이면 만드는 스프레드시트로 일단 펼쳐 놓고 매일 누가 무엇을 실제로 열어보는지를 지켜봤습니다. 그러자 며칠 만에 걸러졌습니다. 화면을 채우던 지표 대부분은 '있으면 좋은' 것이었고, 매일 손이 가는 것은 몇 개뿐이었습니다. 검증의 핵심은 무엇을 넣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버릴지였습니다.

Gridie로 구축한 C&C인터내셔널 팀별 수주현황 실시간 대시보드 화면 — 기간·팀·거래처별 수주 합계금액, 수주 수량, 매출액을 한눈에 조회하고 엑셀 워크북으로 내보내는 영업실적 분석 화면
Gridie로 만든 팀별 수주현황 대시보드. 전사의 수주현황이 보고 없이 매일 자동으로 갱신된다.

가치가 확인된 것을 Gridie에 정착시켰습니다. 검증은 스프레드시트로 충분하지만, 전사로 펼치는 순간 스프레드시트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한 사람이 관리할 때는 문제가 없던 파일이, 여러 부서가 동시에 들여다보고 고치기 시작하면 금세 어긋납니다. 누군가 수식을 잘못 건드리고, 누군가 어제 숫자를 덮어쓰고, 어느 버전이 맞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 누가 무엇을 보고 누가 고칠 수 있는지 — 권한과 편집이 엉키면 애써 맞춘 데이터의 정합성이 다시 무너집니다. 앞에서 도구가 개인기로 흩어졌던 것과 똑같은 문제가, 대시보드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Gridie로 옮기면서 권한과 편집을 구조로 통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누구는 보기만 하고, 누구는 특정 영역만 고치고, 원본은 한 곳에서만 바뀝니다. 그제야 이 대시보드는 '한 사람이 관리하는 파일'에서 '회사가 함께 쓰는 자산'이 됐습니다.

Gridie를 고른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대시보드는 현황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현황을 보다가 '이 숫자를 더 뜯어봐야겠다' 싶을 때, 실무자는 결국 엑셀로 가공합니다. 특정 거래처만 따로 떼서 보거나, 기간을 다시 묶거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계산하는 일은 대시보드 안에서 다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이 지점에서 흐름이 끊깁니다. 대시보드 따로, 그걸 다시 받아 가공하는 엑셀 따로 — 그 사이에서 데이터를 복사하고 붙여넣는 동안 또 어긋납니다. Gridie에서는 대시보드에서 본 데이터를 그대로 엑셀로 이어받아 편집할 수 있습니다.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이 끊기지 않습니다. 실무자가 늘 쓰던 엑셀 작업 방식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엑셀이 전사 데이터와 연결돼 있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새로운 도구를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고, 익숙한 자리에서 일하게 두되 그 결과가 회사 데이터와 어긋나지 않게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숫자가 사람을 찾아가게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대시보드도 사람이 열어보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현장은 바쁩니다. 매일 아침 대시보드에 들어가 확인하는 습관은, 생각보다 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사람이 숫자를 찾아가는 대신, 숫자가 사람에게 가도록. Slack 봇을 붙여,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매일 필요한 숫자가 채널로 먼저 도착하게 했습니다. 보려고 마음먹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무겁게 짓지 않고 싸게 검증하고, 답이 나온 것만 제품에 태워 정착시키고, 그것이 사람에게 닿도록 전달했습니다. 직접 빠르게 만들어 확인하고, 가치가 증명되면 운영 기반에 올리는 것. 도구를 단계마다 갈아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를 검증·정착·전달의 순서로 풀었을 뿐입니다. 큰 시스템을 한 번에 짓겠다는 욕심을 버리니, 오히려 빠르고 단단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같은 도구라도 개인이 흩어져 쓰는 것과, 구조로 설계해 까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AI Labs가 한 일은 후자였습니다.


1편을 마치며

첫 단계에서 제가 확인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AI 도구를 나눠주는 것은 시작일 뿐, 그 자체가 변화는 아닙니다. 도구는 인지를 높이지만, 체질은 구조가 바꿉니다. 그리고 그 구조의 맨 밑바닥에는 화려한 AI가 아니라 '누가 봐도 믿을 수 있는 데이터'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토대는 놓였습니다. 이제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토대 위에서, 회사가 일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다음 편에서는 우리가 전사적으로 시작한 캠페인 — '시간도둑잡기' — 와, 그 캠페인이 단순한 효율화가 아니라 사람의 역할 자체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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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Labs 운영일지 #1 — 우리가 전담 조직을 만든 이유정밀한 회사가, 정작 자기 자신은 보지 못했습니다먼저 한 일은, 소통의 토대를 깔고 손에 도구를 쥐여주는 것이었습니다개인이 도구를 쓰는 것과, 회사가 바뀌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AI Labs의 첫 과제는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였습니다1편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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