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제조 강자의 AI 전환(AX) 기록 ② — 납기준수율 100%는 도구가 아니라 구조에서 나온다
제조업의 경쟁력은 가격·품질·납기, 세 가지로 좁혀집니다. 이 중 회사가 커지면서 전혀 다른 관리체계로 전환하지 않으면 회사를 성장시킨 핵심 경쟁력 세 가지 모두 위협받습니다. 이번 글은 납기관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높은 납기준수율은 의지로 만들어지는 숫자가 아닙니다. 고객의 주문에 따라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는 업종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변경이 즉시 공유되는 구조, 자재 가용재고 파악, 제품별 생산 현황의 가시성 — 이 세 가지가 시스템에 들어와야 비로소 납기가 '운'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 됩니다. 매출 2000억을 넘긴 제조 현장에서, 제조업 AX 도입으로 이 셋을 세운 이야기입니다. 시간도둑잡기 2편입니다.
납기준수율은 왜 회사가 커질수록 무너지나
같은 단어라도 매출 500억짜리 회사의 납기와 2000억짜리 회사의 납기는 다른 문제입니다.
500억 구간에서 납기는 사람으로 굴러갑니다. 자재가 며칠 늦는다는 걸 구매 담당이 알면, 옆자리 생산팀에 연락, 영업에는 카톡 한 줄이면 변경이 전달됩니다. 한 사람 머릿속에 전체 그림이 들어오는 규모라, 통로가 거칠어도 회사가 돌아갑니다.
문제는 2000억을 넘기면서 시작됩니다. 품목이 늘고, 자재가 늘고, 그걸 만지는 담당자가 늘어납니다. 변경의 가짓수와 주고받는 사람의 수가 곱해지면서, 엑셀·전화·카톡이라는 통로 자체가 병목이 됩니다. 같은 자재 납기를 두고 구매팀 엑셀과 생산팀 엑셀이 다른 날짜를 적고 있는데, 둘 다 자기가 맞다고 믿습니다.
"엑셀 말고 메신저를 통일하자", "양식을 표준화하자" 같은 도구를 바꾸는 접근으로도 규모가 만든 곱셈은 줄지 않습니다.
납기준수율을 끌어올리려면 바꿔야 하는 건 도구가 아니라, 변경사항이 소통되는 구조입니다. 변경을 누가 입력하고, 누가 그걸 신뢰하고, 어디를 봐야 최신인지를 오퍼레이션에 박아 넣어야 개선이 시작됩니다. 이걸 빼고 도구만 바꾸면, 더 비싼 엑셀이 하나 더 생길 뿐입니다.
자재 납기는 왜 SAP로 관리되지 않나
당연한 질문이 나옵니다. SAP가 있는데 왜 엑셀로 관리하느냐.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재의 납기는 매일 바뀝니다. 공급사 사정으로 사흘 당겨지기도, 일주일 밀리기도 합니다. 특히 고객사가 공급하는 사급자재의 경우 정확한 납기를 미리 알기도 어렵습니다. 이 변경을 전부 SAP에 반영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고, 너무 자주 일어나고, 처리 절차가 너무 무겁습니다. 한 건 고치는 데 드는 품과, 하루에 수십 건을 쳐내야 하는 현실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현장은 아주 합리적으로 엑셀로 돌아갑니다. 엑셀은 SAP가 못 따라오는 속도를 감당하는, 현장이 찾아낸 임시방편입니다.
문제는 그 임시방편이 회사의 실제 운영 데이터가 되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 순간 회사는 납기준수율을 좌우하는 두 가지를 못 보게 됩니다.
납기준수율 100%를 막는 두 개의 사각지대
자재 가용재고를 못 봅니다. 지금 쓸 수 있는 자재가 얼마인지, 없다면 언제 들어오는지가 어디에도 하나의 숫자로 모이지 않습니다.
제품별 생산 현황을 추적하지 못합니다. 그 수주가 지금 자재 대기인지, 생산 중인지, 출하 직전인지가 담당자별 엑셀에 흩어져 있어 한눈에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 둘을 못 보면 연쇄가 시작됩니다. 가용재고를 모르니 언제 생산이 가능한지 예측할 수 없고, 생산 현황을 추적하지 못하니 어느 수주가 늦고 있는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생산계획이 흔들리고, 고객과 약속한 납품 예정일이 매일 바뀝니다. 납기준수율은 그 흔들림의 최종 점수일 뿐입니다.
맨 끝의 증상은 "납기를 못 지킨다"지만, 시작점은 훨씬 앞에 있습니다. 회사가 무엇을 쓸 수 있고, 각 제품이 지금 어디까지 갔는지를 시스템이 모른다는 것 — 그 둘입니다.
수주트래커 — 두 사각지대를 한 화면으로
시간도둑잡기 1편에서 저는 AI 도입의 병목이 모델이 아니라 '내 문제라는 자각'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번 현장에서 그 자각이 가리킨 자리가 바로 납기였습니다.
우리가 만든 건 수주트래커입니다. 앞에서 회사가 못 본다고 한 두 가지를 한 화면에 띄우는 도구입니다. 수주별로 생산 현황을 모니터링하고, 이슈를 미리 파악해 고객과 조율합니다. 납기를 준수할 수밖에 없는 오퍼레이션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쓸 수 있는 자재가 얼마인지(가용재고), 그리고 각 수주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생산 현황)를, 수주가 들어온 순간부터 납품에 이르기까지 따라가게 만들었습니다. 변경이 생기면 각자의 엑셀이 아니라 트래커 한 곳에 반영되고, 모두가 같은 최신 상태를 봅니다.
릴리즈하고 드러난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모든 팀이 같은 대시보드 하나를 본다는 것입니다.
생산 현황, 가용재고, 품질검수처럼 엑셀과 SAP에 흩어져 있던 10개가 넘는 조회 화면을, 이제 따로 열지 않습니다. 한 화면에서 끝납니다.
아직 베타테스트 중인데도, 100명의 팀원과 CFO·CBO·공장장 같은 주요 임원이 매일 가장 먼저 챙기는 화면이 됐습니다. 제조업 AX 도입의 성패는 결국 '실제로 매일 쓰느냐'에서 갈리는데, 그 증거가 이렇게 빨리 나왔습니다.
엑셀 커뮤니케이션이 사라졌습니다. 구매가 고친 납기를 생산이 다시 묻지 않고, 영업은 고객에게 답하기 전에 그 수주가 지금 어디까지 갔는지 화면에서 확인합니다.
매일 바뀌던 납품 예정일이 '바뀌는 것'에서 '계산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엑셀에서 해방되고 임원이 매일 보는 화면이 됐다는 것도 결과지 본질은 아닙니다.
납기준수율 100%의 진짜 필수과제 — 암묵지를 로직으로
두 사각지대의 뿌리는 같습니다. 시스템에 없으니, 사람 머릿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가용재고는 단순히 창고에 쌓인 수량이 아닙니다. 들어올 자재 중 신뢰할 수 있는 입고일이 언제인지, 이미 다른 수주에 묶인 물량은 빼야 하는지, 안전재고는 어디까지 인정할지 — 이런 판단이 섞여 나오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그동안 베테랑 담당자의 머릿속에만 있었습니다. 생산 현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수주가 지금 어디까지 갔는지를 시스템은 몰랐고, 그 상태는 구매·생산·영업의 머릿속과 각자 엑셀에 흩어진 채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수주트래커가 한 일의 핵심은, 그 머릿속을 회사의 로직으로 꺼낸 것입니다. 엑셀을 없앤 게 아니라, 사람 머릿속에만 있던 '쓸 수 있는 재고'의 정의와 '지금 어디까지 갔는가'라는 상태를 회사의 로직으로 꺼낸 것입니다.
그래서 납기준수율 100%는 결심이 아니라 구조의 결과입니다. 그 구조를 세우는 필수과제는 셋입니다.
변경사항을 공유하는 단일 채널 — 엑셀·전화·카톡으로 흩어지던 변경을 한 곳으로 모은다.
가용재고의 정의를 암묵지에서 로직으로 — '쓸 수 있는 재고'를 사람마다 다른 숫자가 아니라 회사가 합의한 하나의 규칙으로 만든다.
생산 현황을 추적 가능한 단계로 — 각 수주의 상태를 머릿속이 아니라 화면에서 따라가게 한다.
이 셋이 모이면 납기는 운에 맡기는 게 아니라 계산되는 숫자가 됩니다. 납기준수율 100%는 그 계산의 결과지, 벽에 붙이는 구호가 아닙니다.
제조업 밸류업의 첫 과제는 지켜야 할 약속을 잘 지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재무를 보던 회계사입니다. 숫자로 회사를 읽던 사람이 제조 현장의 AX를 설계하면, 우선 비즈니스에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이 중에 가장 빠르게 개선할 수 있는 걸 찾습니다. 납기준수율은 영업·구매·생산이 만든 판단이 한 줄로 모이는 지점이고, 그래서 제조업 밸류업이 가장 먼저, 가장 정직하게 드러나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AX의 임팩트는 멋진 모델을 얹는 데 있지 않습니다. 현장이 암묵지로 버텨온 가정을 찾아내 명시적인 판단 로직으로 꺼내는 일 — 그게 회계사가 가진 무기이고, 제조업 밸류업의 키라고 저는 봅니다. 자동화는 그 다음에야 의미가 생깁니다. 명시화되지 않은 판단은 자동화할 대상조차 없으니까요.
여러분의 공장에서 우리를 성장시킨 핵심경쟁력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나요?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해야할 일들이 지금 시스템에 있지않고,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는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