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ERP, 그리고 Gridie
SAP·Oracle·Workday·더존이 내세운 AI와 Gridie가 해야할 일
지난주 SAP가 연례 컨퍼런스 Sapphire 2026에서 "Autonomous Enterprise"를 발표했습니다. 50개 이상의 도메인 어시스턴트와 200개 이상의 전문 AI 에이전트가 재무·공급망·HR·고객 운영을 자율 실행한다는 청사진입니다. 결산, 세무, 컴플라이언스, AR, 트레저리 — CFO 조직 전반이 대상입니다.
이 발표를 단독으로 읽으면 본질을 놓칩니다. 같은 분기에 Oracle은 Fusion Cloud Applications 위에 새 에이전트군을 얹었고, 12개월 안에 수백 개의 에이전트를 깔겠다고 했습니다. Workday는 Illuminate 플랫폼을 확장하면서 Sana를 11억 달러에 인수했고, 좌석 기반 과금을 Flex Credits라는 소비형 모델로 갈아탔습니다. 국내에서는 더존비즈온이 ONE AI 프리뷰 2026에서 "예측에서 실행으로, 자동에서 자율로"를 내걸고 OmniEsol을 EY한영과 함께 시장에 깔고 있습니다.
같은 분기, 같은 메시지, 같은 방향 —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한 단계 깊이 들어가면 네 회사는 각자 완전히 다른 리스크에 베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CFO가 지금 어떤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결정합니다.
15년간 회계사로, 그리고 AI agent for CFO, 그리디(Gridie)를 만드는 창업자로 이 흐름을 지켜본 입장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어떤 구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글로벌 ERP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리디는 어떤 자리에 있는지.
1. ERP의 30년 패러다임이 끝나가는 이유
ERP는 지난 30년 동안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데이터의 표준화. 영업·구매·재무·인사 데이터를 하나의 스키마에 담아 회사를 하나의 언어로 말하게 만든 것이 ERP의 본질입니다. 둘째, 프로세스의 통제. 발의-결재-실행-기록이 한 시스템 안에서 흘러가게 함으로써 감사 가능성(auditability)과 내부 통제를 확보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ERP는 "기록의 시스템(System of Record)"이었습니다. 사람이 결정하고, 사람이 입력하고, 사람이 검토하고, 시스템은 그것을 충실히 보관하고 보고했습니다.
문제는 이 모델이 한계에 닿았다는 점입니다. 더존비즈온의 원AI 프리뷰 2026에서 삼일PwC 조홍래 파트너가 짚은 진단이 정확합니다. 글로벌 공급망의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한 수요 변동, 폭증하는 데이터 — 시스템 간 연결과 통합이 미흡한 상태에서 ERP는 의사결정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입력은 늘었는데 인사이트는 줄었습니다.
여기서 글로벌 ERP들이 동시에 도달한 결론이 같습니다. ERP는 기록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위에 "행동하는 레이어"가 올라가야 합니다. Workday의 표현을 빌리면 "Passive system of record"에서 "System of action"으로의 전환입니다. 조홍래 파트너의 표현으로는 "ERP 위에 AI 에이전트 레이어가 올라갈 때 비로소 기업의 운영모델이 바뀐다."
말장난이 아니라 구체적인 아키텍처 변화입니다.
2. 빅4(SAP·Oracle·Workday·더존)의 공통 플레이북
각자의 발표를 나란히 놓고 보면, 표현은 다르지만 구조는 거의 동일합니다.
구분 | SAP | Oracle | Workday | 더존비즈온 |
|---|---|---|---|---|
AI 브랜드 | Joule + Joule Agents | Fusion AI Agents | Illuminate Agents | ONE AI / OmniEsol |
에이전트 규모 | 200+ 전문 에이전트, 50+ 도메인 어시스턴트 | 12개월 내 수백 개 | 수십 개 (Financial Close, Payroll, Audit 등) | 회계·세무·법무 도메인별 |
개발자 환경 | Joule Studio | Fusion AI Studio | Flowise Agent Builder + Build | GEN AI DEWS |
데이터 기반 | SAP Business Data Cloud + Knowledge Graph | Fusion 데이터 | Workday Data Cloud (Databricks/Snowflake 제휴) | ERP+그룹웨어+전자세금계산서 통합 데이터 |
거버넌스 허브 | LeanIX AI Agent Hub | AI Governance | Workday Agent System of Record + MS Entra | (자체 거버넌스) |
과금 모델 신호 | 좌석 기반 압박 → 변동성 검토 중 | (논의 진행 중) | Flex Credits (소비형 구독) | 클라우드 전환+모듈별 |
여기서 읽어야 할 패턴 네 가지.
첫째, "에이전트 공장(agent factory)" 모델이 표준이 됐습니다. 단일 챗봇이 아니라, 도메인별 전문 에이전트 수백 개를 만들고, 그 위에 어시스턴트(오케스트레이터)가 여러 에이전트를 조합해 워크플로를 실행하는 2단 구조입니다. SAP의 50개 어시스턴트 + 200개 에이전트, Workday의 도메인 에이전트군이 같은 형태입니다.
둘째, "데이터 레이어"가 새로운 해자(moat)가 됐습니다. SAP는 Business Data Cloud + Knowledge Graph를 전제로 합니다. Workday는 Databricks·Snowflake와 제로 카피 데이터 셰어링으로 묶었습니다. 더존비즈온 지창진 사장의 표현이 직설적입니다. "더존의 ERP와 그룹웨어를 쓰는 순간 파편화된 회계·세무 데이터가 표준화되고 이것이 곧장 AI 학습이 가능한 자산으로 전환된다." 즉, AI 에이전트는 데이터를 가진 자의 게임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셋째, "에이전트 빌더 + 거버넌스 허브"가 필수 컴포넌트로 들어왔습니다. Joule Studio, Flowise Agent Builder, LeanIX AI Agent Hub — 고객사가 자체 에이전트를 만들고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ERP 벤더가 단순히 에이전트를 파는 게 아니라, 에이전트 운영 플랫폼이 되려 한다는 뜻입니다.
넷째, 과금 모델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SAP는 1월 29일 하루에 주가가 15% 빠졌습니다. 표면 원인은 클라우드 수주 둔화였지만, 시장이 더 민감하게 반응한 지점은 "AI 에이전트가 ERP 좌석 수요를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직원이 하던 일을 에이전트가 하면, 직원 수만큼 SAP 계정을 유지할 필요가 줄어듭니다. Workday가 선제적으로 Flex Credits(소비형 크레딧)를 내놓은 이유입니다. 좌석 기반 모델의 종착역이 가까워졌음을 본인들이 가장 잘 압니다.
이 네 가지를 합치면 ERP 산업은 지금 데이터+에이전트 플랫폼으로 정체성을 재편 중입니다. 더 이상 "회계장부 + 결재"가 아니라, "회사의 인지·실행 운영체제"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3. SAP의 "Autonomous Enterprise"를 한 단계 더 깊이 보면
빅4 모두 같은 방향이지만, SAP의 발표는 그 안에서도 가장 야심찹니다. 핵심 단어 두 개에 주목할 만합니다.
"엔드 투 엔드(End-to-End)": 이전 AI 발표들이 결산이나 세무처럼 특정 기능에 국한됐다면, 이번엔 "재무의 모든 부서"를 다 덮겠다고 합니다. 결산 어시스턴트 하나만 봐도 병목 식별, 분개·대사 자동화, 차이 실시간 해결까지 한 루프로 묶습니다. AR, 세무, 컴플라이언스, 트레저리 각각도 같은 방식입니다.
"설명 가능한 결정(Explainable Decisions)": 에이전트가 비즈니스 컨텍스트를 가로질러 추론하고, 그 결정을 설명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CFO가 가장 신경 쓰는 감사 가능성 때문입니다. 자동화는 좋지만 "왜 그 분개를 했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면 외부감사·세무조사에서 무너집니다. SAP는 그 지점을 알고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냉정하게 봐야 할 게이팅 조건이 있습니다.
SAP의 AI 에이전트를 제대로 쓰려면 SAP Business Data Cloud를 구축해야 하고, ERP 데이터를 그 플랫폼에 통합해야 합니다. SAP Data Intelligence로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Integration Suite로 RESTful API와 OData 프로토콜을 활용하며, HANA Cloud로 데이터 복제/가상화를 깔고, BTP 위에 중앙 집중식 인증을 올립니다. 한 마디로 "SAP 풀스택에 머무는 한에서만 AI 에이전트가 작동한다."
이건 자연스러운 비즈니스 결정입니다. SAP는 자기 데이터 위에서 AI가 가장 잘 돌게 만들어야 락인이 유지됩니다. 다만 고객 입장에서는 이게 곧 비용과 시간입니다. CFO Dive가 SAP의 David Imbert 인터뷰에서 끌어낸 솔직한 코멘트가 핵심을 짚습니다. AI 확산의 가장 큰 장애물은 "데이터 준비도(data readiness), 워크플로 통합, 인력 스킬"이라는 것. 즉 SAP 자신도 데이터 인프라가 안 깔려 있으면 자기 에이전트도 못 돌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게이팅 조건이 SAP의 Autonomous Enterprise가 닿을 수 있는 고객층을 자연스럽게 한정합니다. SAP S/4HANA를 이미 쓰는 글로벌 대기업·중견기업. 그게 1차 시장입니다.
4. 한국 시장의 특수성: 더존비즈온이 보여주는 또 다른 길
글로벌 ERP의 움직임을 그대로 한국 시장에 옮기면 그림이 어긋납니다. 한국 SMB·중견기업 시장에는 더존비즈온이라는 압도적 1위 사업자가 있고, 시장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더존비즈온 지창진 사장이 ZDNet 인터뷰에서 한 말이 정확합니다. "사스포칼립스 공포에도 우리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근거는 두 가지. (1) 고객층의 특수성 — 한국 중소·중견기업은 자체적으로 AI 에이전트를 만들어 ERP를 대체할 여력이 없습니다. (2) 데이터의 완결성 — 더존 ERP를 쓰는 순간 회계·세무·인사 데이터가 표준화되어 AI 학습 자산이 됩니다.
이 논리는 SAP와 본질적으로 같지만, 시장 환경 덕에 한국에서는 더 강하게 작동합니다. 글로벌 SMB는 NetSuite·QuickBooks·Xero 등 선택지가 많지만, 한국 SMB는 사실상 더존·SAP·Oracle 삼파전이고, 그중 SMB 영역에서는 더존이 압도적입니다. 13,000개 스탠다드 ERP 고객 중 Amaranth 10(클라우드 신제품)으로 전환한 게 약 4,600곳. 남은 8,400곳의 전환만으로도 2~3년 성장 가시성이 확보됩니다. EY한영과의 MOU는 중견기업 시장의 회계·재무 컨설팅 영업까지 보강했습니다.
더존비즈온이 그리는 AI는 SAP보다 더 야심찬 측면이 있습니다. 송호철 플랫폼사업부문 대표가 AI WAVE 2025에서 한 말. "기업 내부 전문가를 고용하는 개념처럼 AI 에이전트를 조직 내에 배치하겠다." 회계·법무·인사 도메인 에이전트를 만들어 중소기업 고객이 선택적으로 "고용"하는 모델입니다. 이미 법인세 세무조정 자동화는 상용화됐고, 고용계약서 작성·휴가 수당 계산도 AI가 대행합니다. KTX 시간표 API까지 끌어와서 출장 품의를 자동 생성하는 시나리오도 시연했습니다.
여기서 한국 시장의 구도가 명확해집니다. 더존비즈온은 한국에서 SAP가 글로벌에서 하는 것과 동일한 일을 합니다 — ERP 데이터 위에 AI 에이전트 레이어를 얹어 SMB·중견기업의 자율 운영을 잡겠다는 전략입니다.
문제는, 이 전략 역시 같은 게이팅 조건을 가집니다. "더존 ERP를 깔아야 한다."
5. 그리디(Gridie)가 서 있는 자리
여기까지 보면 그리디 같은 회사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가 오히려 선명해집니다.
빅4의 공통점은 "우리 ERP를 깔고, 우리 데이터 레이어를 갖춘 다음에야 AI가 작동한다"는 전제입니다. 이 전제가 못 닿는 곳이 어디인가.
5.1. 시장의 빈틈
한국에는 두 부류의 회사가 존재합니다.
(A) ERP 풀스택을 못 깐 회사들: 직원 10~100명 규모, 매출 수십억~수백억 원, 회계·세무는 회계법인/세무사무소에 의존하고, 내부 운영은 엑셀과 일부 클라우드 도구(채널톡, 노션, 슬랙, 카카오워크)로 굴립니다. 더존 위하고를 쓰기도 하지만 깊이 있게 활용하진 못합니다. 한국 사업체의 절대 다수가 여기 있습니다.
(B) ERP는 있는데 그 위 워크플로가 부서지는 회사들: SAP나 더존 ERP를 쓰지만, FP&A·관리회계·경영보고는 여전히 엑셀 지옥입니다. ERP에서 데이터를 뽑아 다시 엑셀에서 다듬는 일이 매월 반복됩니다. SAP Autonomous Enterprise를 도입하려면 Business Data Cloud부터 깔아야 하는데, 그 비용·시간을 감당할 여력이 없는 중견기업.
빅4의 에이전트 전략은 (A)에는 아예 닿지 않고, (B)에서도 도입 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이 두 영역이 그리디의 시장입니다.
5.2. 그리디가 다른 점
차원 | SAP Joule Agents / 더존 ONE AI | 그리디 |
|---|---|---|
전제 조건 | 자사 ERP + 자사 데이터 클라우드 필수 | ERP 없이도, 어떤 ERP라도 데이터 소스로 수용 |
도입 시간 | 수개월~수년 (BDC 구축, 데이터 통합) | 수일 (엑셀·클라우드 데이터 즉시 연결) |
타깃 고객 | S/4HANA 사용 대기업·중견 / 더존 ERP 고객 | ERP-라이트 SMB, ERP는 있으나 위 레이어가 부서진 중견 |
도메인 모델 | 범용 비즈니스 프로세스 위에 AI | 회계사가 설계한 도메인 모델 위에 AI |
채널 | 대형 SI·컨설팅펌(EY, PwC, Accenture) | 회계법인·세무사무소(QuickBooks ProAdvisor 모델) |
과금 | 좌석 기반 → Flex Credits 전환 중 | 처음부터 처리량/에이전트 작업량 기반 설계 가능 |
가장 본질적인 차별점은 "도메인 깊이"입니다. SAP·Oracle·Workday는 비즈니스 프로세스 전반을 다루는 제너럴리스트입니다. 강점이자 약점입니다. 재무 한 영역만 보면 깊이가 부족합니다. 결산 어시스턴트 하나에 들어가는 한국 세법·기업회계기준의 디테일을 보면, 글로벌 ERP가 일반화한 결산 모델로는 한국 회계법인의 실무 요구를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통합고용세액공제(조특법 제29조의8)의 2026년 개정 같은 디테일은 한국 회계사가 직접 빌드한 도메인 모델에서만 살아남습니다.
두 번째 차별점은 채널입니다. SAP·Oracle·Workday가 EY·PwC·Accenture 같은 빅 컨설팅을 통해 대기업을 잡는다면, 그리디는 회계법인·세무사무소를 통해 그 회계법인이 보유한 수백~수천 곳의 SMB 고객에 침투합니다. 한국에는 약 11,000개 회계법인·세무사무소가 있고, 각 사무소는 평균 수십~수백 곳의 고객사를 보유합니다. 이 채널은 빅4의 직접 영업이 닿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QuickBooks가 미국에서 ProAdvisor라는 회계사 네트워크를 통해 SMB 시장을 장악한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세 번째는 가격 모델입니다. SAP는 좌석 기반 모델에 갇혀 주가가 흔들렸습니다. Workday는 Flex Credits로 옮겨가는 중입니다. 그리디는 처음부터 좌석에 매이지 않는 모델로 설계할 수 있습니다. 자동화한 분개 건수, 처리한 인보이스 수, 생성한 보고서 건수 — 에이전트가 일한 만큼 과금하는 모델이 가능합니다. 직원이 줄어도 매출이 줄지 않고 오히려 처리량이 늘면 매출이 늡니다.
5.3. 그리디는 ERP가 아니다 — "재무 자동화 인프라"다
오해 없이 짚어둘 게 있습니다. 그리디는 SAP나 더존비즈온의 ERP 자리를 노리지 않습니다. 그건 30년의 데이터 표준화·내부 통제 신뢰가 쌓인 시장이고, 거기서 새 ERP를 만든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도전입니다.
그리디는 ERP 위 또는 ERP 옆에 깔리는 재무 자동화 인프라입니다. ERP가 없는 회사에게는 가벼운 회계·세무·관리 워크플로를 제공하고, ERP가 있는 회사에게는 그 ERP 데이터를 받아 FP&A·관리회계·경영보고 레이어를 자동화합니다. 일론 머스크가 자율주행을 설명할 때 "FSD는 차를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차 위에 자율 주행 두뇌를 얹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이 비유에서 한 가지가 더 흥미롭습니다. SAP·Oracle·Workday·더존도 자기 ERP 위에 자기 자율 주행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건 자기 차에만 작동합니다. 그리디는 어느 차에든 얹힐 수 있는 자율 주행 모듈을 지향합니다. 이게 작동하려면 ERP-중립적이어야 하고, 회계사 도메인 모델로 무장해야 하고, 회계사 채널로 침투해야 합니다. 세 조건이 다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6. CFO·회계사가 지금 해야 할 판단
이 글을 읽는 분이 기업 CFO나 재무팀장, 또는 회계법인 파트너라면 지금 결정해야 할 게 있습니다.
S/4HANA를 쓰는 글로벌 진출 대기업·중견기업이라면: SAP의 Autonomous Enterprise 로드맵을 진지하게 검토할 시점입니다. Business Data Cloud 구축은 단기 비용이지만, 결산 어시스턴트·세무 어시스턴트의 ROI가 12개월 안에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 좌석 기반 과금이 어떻게 재편되는지 협상 카드로 활용해야 합니다.
더존 ERP를 쓰는 한국 중견·중소기업이라면: ONE AI / OmniEsol 로드맵을 따라가되, 비-더존 데이터(채널톡, 슬랙, 카카오워크, 외부 API)를 끌어와야 하는 워크플로에서는 보완 솔루션이 필요합니다. 더존이 모든 API를 빠르게 끌어오긴 어렵습니다.
ERP 풀스택이 없는 SMB·스타트업이라면: 굳이 더존이나 SAP를 깔 필요가 없습니다. 회계법인 채널을 통해 가벼운 재무 자동화 솔루션(그리디 같은)을 도입하는 게 합리적입니다. ERP 도입 비용·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핵심 80%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회계법인·세무사무소라면: 자기 사무소의 100~500곳 고객사에 어떤 디지털 도구를 제안할지가 향후 5년의 경쟁력을 결정합니다. SAP·더존을 깔아주는 SI 역할은 빅4 컨설팅이 가져갑니다. 회계법인의 자리는 다릅니다. 회계사가 직접 운영하는 AI 인프라를 통해 고객사의 회계·세무·관리회계를 자동화하고, 그 자동화 위에서 더 높은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델입니다. 미국 QuickBooks ProAdvisor가 그 길을 먼저 보여줬습니다.
7. 닫는 말: 시스템 오브 액션의 두 가지 경로
ERP가 시스템 오브 액션으로 진화한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다만 그 액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두고 두 경로가 갈립니다.
첫 번째 경로: ERP 벤더가 곧 액션의 주체입니다. SAP·Oracle·Workday·더존이 자기 ERP 안에 에이전트를 심고, 자기 데이터 위에서 자율 실행합니다. 이건 빅4의 길입니다. 강력하지만 락인이 깊고, 빅4의 풀스택을 깐 회사에만 닿습니다.
두 번째 경로: 도메인 전문가(회계사)가 액션의 주체입니다. 회계사가 데려다니는 AI가 고객사의 ERP·엑셀·API 어디서든 데이터를 끌어와 회계·세무·관리회계를 자율 실행합니다. 이건 그리디의 길입니다. 가볍지만 도메인이 깊고, ERP 유무와 상관없이 닿습니다.
두 경로는 서로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공존하면서 시장을 함께 키웁니다. 빅4가 깔지 못하는 SMB 시장은 도메인 인프라가 채우고, 빅4가 깐 대기업에서도 도메인 인프라가 보완 레이어로 들어갑니다. 미국에서 NetSuite·SAP·Workday가 있는데도 Ramp·Brex·Bill.com 같은 재무 자동화 인프라가 따로 자라난 게 이 구조입니다.
지금 한국 시장은 1년 전과 다른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SAP Sapphire 2026의 발표는 그 신호입니다. ERP가 자기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는 동안, 그 위·옆·바깥에서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인프라가 함께 자라납니다. 그리디가 만들고 있는 것은 그 두 번째 경로의 한국 버전입니다.
회계사가 30년간 쌓은 도메인 지식 위에, AI가 일할 수 있는 인프라를 얹는 것. 그 인프라를 회계법인 채널을 통해 SMB에 보급하는 것. ERP가 시스템 오브 액션으로 진화하는 그 거대한 파도에서, 빅4가 가져가지 않는 절반의 시장을 우리가 책임지는 것.
이 길은 SAP의 길보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 SMB 99%의 현실에 닿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회계사라는 직업의 미래에 정직하다는 점에서 더 단단한 길이라고 믿습니다.